오늘은 부안 적벽강 퇴적층에 대해 소개합니다.
수만 년 동안 쌓이고 깎인 전북 부안 적벽강의 퇴적층은, 붉고 검은 결이 켜켜이 겹쳐진 채 지구의 오래된 호수·화산·바다의 이야기를 한눈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지질 교과서입니다.
Ⅰ. 바다의 절벽에 놓인 오래된 책—적벽강을 처음 만나는 법
격포 앞바다로 나가면 서해의 파도와 바람이 만든 절벽이 길게 이어집니다. 그중에서도 적벽강은 이름처럼 붉은 기운이 도는 절벽(赤壁)이 바다를 향해 서 있습니다. 이곳의 바위와 지층은 아주 오래전, 중생대 백악기(약 8천만~6천만 년 전)에 쌓인 퇴적암과 그 뒤를 잇는 화산 활동의 흔적이 한 장면에 포개져 있어요. 바다와 강, 호수가 차례로 주인공이었던 이 해안은 오늘날 퇴적층·단층·습곡이 복잡하게 발달한 지질 전시장입니다.
적벽강은 변산반도 서단의 해식애(바닷물에 깎인 절벽) 구간으로, 파랑이 세차게 들이치며 절벽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 왔습니다. 같은 해안권의 채석강과 함께, 수만 권의 책을 눕혀놓은 듯한 층리(층층이 결)가 아름다워 경관 가치가 높고, 파식대·해식애·해안단구 등 해안 지형 요소가 잘 발달해 연구 가치도 큽니다. 이 주변 해안을 따라 걸으면 정단층·역단층·주향이동단층 같은 여러 형태의 단층과 습곡을 곳곳에서 관찰할 수 있죠.
무엇보다 적벽강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퇴적층 사이로 화산암(유문암·응회암 등)이 관입하고, 그 과정에서 페페라이트(peperite)라 불리는 독특한 조직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뜨거운 유문암질 용암이 아직 단단히 굳지 않은 차가운 퇴적층과 만나며 빠르게 식고 뒤섞여 생기는 조직으로, 적벽강 절벽 곳곳에서 독특한 무늬로 나타납니다. “붉은 벽” 위에 남은 화산과 호수의 공존 기록인 셈이지요.
Ⅱ. 퇴적층을 읽는 눈—색과 결, 그리고 단층·습곡의 메시지
적벽강 절벽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색의 층입니다. 붉은 갈색, 짙은 회색, 검은색이 켜켜이 바뀌며 이어지는데, 이는 강과 호수 환경에서 다른 시기에 쌓인 자갈·모래·실트·점토가 다르게 굳어 생긴 결과입니다. 한때 이 일대엔 넓은 호수 분지가 있었고, 강물이 실어온 다양한 입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바닥에 가라앉아 사암·실트암·셰일로 변했어요. 이후 지반이 융기하며 지표로 솟아올랐고, 신생대 이후 반복된 해수면 변동과 파랑의 절단이 오늘의 ‘단면’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벽을 한 번에 바라보기만 해도 과거 환경의 변화를 세로로 읽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질학자들은 적벽강 일대 퇴적층(격포리층)을 두께 약 500m의 비해성층으로 설명합니다. 하부엔 응회암과 각력암이, 상부로 갈수록 사암·흑색 셰일·슬레이트가 우세해지는데, 이는 화산활동의 흔적과 고요한 퇴적 환경이 교차했음을 뜻하지요. 절벽에는 단층이 칼로 그은 듯 층을 어긋나게 하고, 압축력과 유동으로 생긴 습곡이 사선의 물결처럼 휘어져 있습니다. 중생대 말 분지의 주향이동단층대 환경에서 이런 퇴적·변형이 진행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페페라이트는 이 퇴적의 ‘책장’ 사이에 끼어든 화산의 주석 같은 존재예요. 뜨거운 마그마가 퇴적층을 관입하며 온도차로 깨뜨리고 섞인 각력이 모자이크처럼 남습니다. 절벽에서 점 모양·렌즈 모양의 암편이 뒤섞인 구간을 만나면, 그곳이 바로 적벽강이 자랑하는 지질 학습 포인트. 현장에서 관할 안내판이나 지질공원 해설 자료와 함께 보면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장 관찰 포인트
• 색 변화: 붉은 사암/갈색 실트암/검은 셰일이 어떻게 층을 이루는지.
• 결(층리)과 굵기: 굵은 자갈층—빠른 유속, 고운 실트·점토—잔잔한 수역.
• 단층선: 층이 끊기거나 어긋난 자리 찾기(정단층 vs 역단층).
• 습곡: 리본처럼 휘어진 층—퇴적물이 아직 ‘부드러울 때’ 변형되었음을 시사.
• 페페라이트: 퇴적층 사이에 끼어든 화산-퇴적 혼성 조직의 불규칙 무늬.
Ⅲ. 적벽강 지질 산책 가이드—아이와 함께 읽는 ‘시간의 절벽’
적벽강은 관광 명소이면서도 지질·생태 교육의 현장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아래 동선과 팁을 참고해 ‘사진 찍는 여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층을 읽는 여행을 해보세요.
동선 잡기
채석강–죽막동–적벽강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은 해식애·파식대·층리가 연속적으로 드러나는 구간입니다. 안내판과 안전 시설을 따라 표시된 탐방로만 이용하세요. 바닷물은 조차가 커 길을 순식간에 바꿉니다.
바다와 절벽을 동시에 담을 땐 만조 직전/직후의 부상(빛)을 이용하면 색 대비가 깊어집니다.
보존과 안전
절벽 하단은 낙석·파랑이 잦습니다. 출입 통제 구간은 절대 넘지 마세요.
층석 채취 금지: 작은 조각이라도 가져가면 교육·연구 가치가 훼손됩니다.
사구(모래언덕)·식생대를 밟지 않기—해안 식물은 모래를 붙잡아 절벽 기저부를 보호합니다. (사구·해안 보전의 일반 원칙)
한 걸음 더: 적벽강을 둘러싼 ‘지질 배경 지식’
기반암과 퇴적: 적벽강 일대는 선캄브리아기 화강암·편마암 위에 백악기 호수 퇴적층(셰일·석회질 셰일·사암·역암 등)이 얹혀 있고, 말기 화산활동의 관입이 더해졌습니다. 혼펠스(열 변성)에 가까운 층도 협재되어 당시 퇴적과 화산활동이 공존했음을 말해 줍니다.
분지와 단층: 백악기 말 주향이동단층대 환경에서 퇴적이 두껍게 쌓였고, 후대의 변형으로 단층·습곡이 뚜렷합니다. 절벽은 그 내부 구조를 바다의 칼이 잘라 보여준 단면입니다.
페페라이트의 교훈: 뜨거운 유문암질 마그마가 차가운 퇴적층과 만날 때 생기는 용암-퇴적 혼성 조직. 적벽강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색과 결로 읽는, 당신만의 지층 이야기
적벽강을 떠날 즈음이면 절벽의 붉은 색이 왜 ‘시간의 빛깔’인지 알게 됩니다. 흐르는 강과 잔잔한 호수, 뜨거운 용암과 차가운 진흙, 뒤늦게 찾아온 파도까지 지구의 사건들이 한 벽면에 필사(筆寫)된 곳, 그곳이 바로 적벽강이에요.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오늘보다 조금 더 천천히, 한 줄 한 줄을 읽어주세요. 절벽은 그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쓰이고 있는 이야기니까요.